사회적협동조합 도우누리(구 늘푸른돌봄센터) 이현주 실장님이 광진주민연대 오랜 활동을 접고

서울시돌봄종사자종합지원센터에서 새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86년부터 지역과 인연을 맺고 성동주민의원, 돌봄센터, 아기사랑후원회, 민들레, 늘푸른가게 등

주민연대 새로 시작하는 활동에 늘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현주 실장님을 광진사람들 오봉석 발행인이 만나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실장님 정말 수고하셨고, 사랑합니다. 

 

 

 

Q. 먼저, 선생님의 살아오신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경기도 여주에서 13녀중 셋째로 태어났어요. 초등학교 3학년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져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중학교 선생님이 예치금을 내주셔서 중학교 입학을 할 수 있었으나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업을 중단했어요. 청량리의 청소년회관이라는 곳에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장학금으로 마쳤어요. 야간반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지금의 남편은 검정고시를 같이 공부했던 친구였는데, 나이들어 20대 들어 사귀게 되었어요. 저는 이상하게 대학생은 철이 없어 눈에 안 들었어요. 검정고시부터 함께 공부했던 지금의 남편이 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에 사귀게 되었지요.

연애를 계속하다가 1990년 스물 여덟살때 결혼했어요. 신혼집은 망우동에서 살다가 성동구로 이사왔지요.

 

딸과 아들 둘이 있습니다. 딸도 저처럼 간호학을 전공했어요. 올해 졸업하고 실습교육하고 발령대기중이예요. 원래는 식물을 좋아했는데 고1때 한비야씨의 책을 읽고 사회봉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제가 간호학 공부를 권했지요. 2년간 얘기를 많이 나눈 끝에 수시부터 정시까지 간호학과만 썼어요.

아들은 대학 2학년인데, 지금은 휴학중입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고 싶다고 하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시민단체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것이 아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아이들과 함께 여행도 가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광진주민연대와 함께 컸다고 생각합니다^^

 

 

Q. 우리지역과는 어떻게 인연을 시작하시게 되었는지요?

 

1986년도에 성동(광진)지역의 활동을 시작했어요.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3학년 재학때였지요.

성수동에서 야학을 중심으로 무료진료활동을 시작했어요. 이 때 지역에서 제 전공인 의료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죠.

가족들의 권유로 1988년 대학 졸업후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사했다가 1년 반만에 퇴사하고, 영세한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을 위해 만들어진 동부진료소연합(연세대와 서울대, 한양대 의료계 학생들이 모여 만든 단체)의 간사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수의원 양길승 원장님의 제안으로 성수의원에서도 근무했고요...

 

Q. 주민의원을 거쳐 늘푸른돌봄센타(이하 돌봄)에서 일을 하시며 느끼신 게 많을 텐데요...

 

요양보호사, 산후관리사, 장애인활동보조인 등으로 불리워지는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계세요. 이 분들은 고용이 불안정하고 다 시간급제이기 때문에 돌보던 사람이 사고가 생기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직장을 잃게 돼요. 그리고, 몸으로 하는 일이라 근골격계 질환이 많고요, 대인서비스직이다보니 감정노동이나 감정스트레스가 매우 심해요.

그런데, 기껏해야 가사도우미 정도로 취급되는 사회적 인식이 큰 문제예요.

 

[이현주님의 송별회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이현주님 ⓒ광진사람들]

 

[이현주님의 송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 왼쪽 네 번째가 이현주님 ⓒ광진사람들]

 

Q. 이현주 선생님의 송별회때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529일 사직원을 내고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잠도 잘 안 오고 앞으로 내 삶을 지탱하는 게 뭘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건, 아마도 삶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힘일 것 같아요.

 

중학교를 검정고시로 공부했던 시절의 경험이 제 삶의 기본이었고, 저한테 광진주민연대는 생활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든 시기 제일 힘이 되었던 게 건강소모임 사람들이었어요. 중년 여성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이 저를 잘 버티게 했던 힘이었던 것 같아요.

 

반면에 상근활동가라는 이름을 듣기에는 제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폭이 좁게 활동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주민의원, 늘푸른돌봄센타 내부의 생활을 주로 해서 사실 지역을 잘 몰라요. 지금 생각하니 이 점이 가장 아쉽고 그래요. 선배 그룹의 역할이 있었을 텐데 지원자의 역할에 머문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주로 했었어요.

 

주민의원을 2008년에 정리했어요.

2000년 즘에는 선배그룹으로서 지역에 나가서 지역활동을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현주님에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 나누는 모습 ⓒ광진사람들]

 

 

 

Q. 해남에서 농사짓는 게 꿈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 51세인데, 예전부터 50살이 넘으면 여유롭게 생활하고 싶은 꿈이 있었어요. 다른 방식의 삶으로 전환하고 싶었지요. 농촌에 대한 환상이랄까. 옹달샘학교 처음 했던 친구가 해남이 있어서 가보니까 편안하고 좋더라구요.

 

원래는 아이들이 졸업하는 올해 해남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어요.

남편은 처음에는 좀 별로였던 듯한데, 두 세 차례 해남을 같이 다녀오고 나서야 생각이 조금씩 바뀐 것 같아요. 해남에서 몇 분 만났는데 농촌에는 사람자체가 없어서 내려오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도 더불어 살아가려구요...

 

그러던 차에, 서울시 노인돌봄종사자종합지원센터가 은평구에 생겼어요. 6월중순, 이 단체에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고 고민을 하다가 좀 더 일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수락을 했어요.

해남은 그 다음으로 생각중이예요. 지금 귀농학교도 다니는 중인데, 더 준비를 갖춰 내려갈 생각입니다.

 

10년후에는 해남에 정착하는 게 꿈입니다. 3년쯤 정착하면 나름대로 도시 사람들이 해남에 왔을 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을 키웠듯이, 큰 딸이 애를 낳으면 봐줄 생각이에요. 저는 노인의 중요한 역할이 손자 양육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찌보면, 적정한 선에서의 노후대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딸도 일하는 여성으로 살았으면 해요.

 

[27년간의 상근활동직을 마감하신 늘푸른돌봄센타 이현주 실장님  ⓒ광진사람들]

 

 

Q. 최근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해 느끼시는 점이 있다면?

 

'마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경향은 좋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진짜 마을다운 마을을 만들려면 붐을 타기 보다는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사람이 중심이 되는 마을이어야지, 성과를 내기위한 일을 위한 마을은 우려스럽습니다.

 

Q. 끝으로 마을신문 [광진사람들]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마을 곳곳에서 훌륭한 일들을 하시는 분들의 따뜻함이 흐르는 이야기를 실었으면 합니다. 예를 들면, 요양보호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싣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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